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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1/자연

골짜기/골

 

 

▲ 저승골 http://blog.daum.net/onidiras/15875565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홍지가 금돌성에서 일제히 성문을 열고 나와 앞과 뒤에서 협공 당한 몽골군은 우왕좌왕하다 제4의 관인이 화살에 맞아죽고 군사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백화산(白華山) 기슭 이 골짜기는 몽골군이 많이 죽었다 해서 그 후 ’저승골‘로 불려왔다.”

구중서 소설 ’항몽전쟁- 참혹한 산하 2권‘의 한 구절이다.

"몽고장수 차라대가 상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황령사의 승 홍지(洪之)가 제4관인을 사살하고 사졸의 죽은 자도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十月戊子, 車羅大 攻尙州山城, 黃嶺寺僧 洪之, 射殺第四官人,士卒死者過半, 遂解圍而退)

고려사에 기록된 ‘저승골’과 연관된 이야기는 이후 패퇴한 몽골군이 남하하며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었고, 살육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몽골의 난이 있은 이래로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고 하였다.

是歲蒙兵所虜男女,無慮二十萬六千八百餘人,殺戮者不可勝計,所經州郡,皆爲煨燼,自有蒙兵之亂,未有甚於此也。

‘저승골’에서 패퇴한 보복으로 여겨지며 ‘저승문’ ‘저승골‘에서 ’저승폭포‘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몽골군을 유인한 방향이고 초겨울 빙판을 이룬 ’저승폭포‘ 부근에서 협공을 당해 아비규환을 이뤘으며 간신히 도망친 몽골군이 내를 건너자 건너편 ’전투갱변‘에서 매복하여 대첩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백화산 최고봉 한성봉은 원래 ‘恨城峰’인데 몽골군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가 물러가며 ‘恨을 남긴 성과 봉우리’에서 유래되고 ‘방성재’는 몽골군이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하여 구전된 지명이다.

육군본부 간행 “고려 전쟁사”에도 ‘대승첩’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은 대첩 이후 고려가 몽골군에 항복하며 ‘반역의 장소’로 격하되어 혹은 순수 민간인들의 항쟁이었기에 세간의 이목에서 사라진 듯하다.

▲ 아직도 푸르름이 남아 있다. 이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늦게까지 초록을 유지하고 있다. 동막골 http://blog.daum.net/onidiras/15876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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