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기나방
▲ 털중나리
▲ 좁쌀풀
▲ 무당개구리
▲ 너덜지대
▲ 출렁다리
▲ 저승골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홍지가 금돌성에서 일제히 성문을 열고 나와 앞과 뒤에서 협공 당한 몽골군은 우왕좌왕하다 제4의 관인이 화살에 맞아죽고 군사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백화산(白華山) 기슭 이 골짜기는 몽골군이 많이 죽었다 해서 그 후 ’저승골‘로 불려왔다.”
구중서 소설 ’항몽전쟁- 참혹한 산하 2권‘의 한 구절이다.
"몽고장수 차라대가 상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황령사의 승 홍지(洪之)가 제4관인을 사살하고 사졸의 죽은 자도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十月戊子, 車羅大 攻尙州山城, 黃嶺寺僧 洪之, 射殺第四官人,士卒死者過半, 遂解圍而退)
고려사에 기록된 ‘저승골’과 연관된 이야기는 이후 패퇴한 몽골군이 남하하며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었고, 살육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몽골의 난이 있은 이래로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고 하였다.
是歲蒙兵所虜男女,無慮二十萬六千八百餘人,殺戮者不可勝計,所經州郡,皆爲煨燼,自有蒙兵之亂,未有甚於此也。
‘저승골’에서 패퇴한 보복으로 여겨지며 ‘저승문’ ‘저승골‘에서 ’저승폭포‘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몽골군을 유인한 방향이고 초겨울 빙판을 이룬 ’저승폭포‘ 부근에서 협공을 당해 아비규환을 이뤘으며 간신히 도망친 몽골군이 내를 건너자 건너편 ’전투갱변‘에서 매복하여 대첩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백화산 최고봉 한성봉은 원래 ‘恨城峰’인데 몽골군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가 물러가며 ‘恨을 남긴 성과 봉우리’에서 유래되고 ‘방성재’는 몽골군이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하여 구전된 지명이다.
육군본부 간행 “고려 전쟁사”에도 ‘대승첩’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은 대첩 이후 고려가 몽골군에 항복하며 ‘반역의 장소’로 격하되어 혹은 순수 민간인들의 항쟁이었기에 세간의 이목에서 사라진 듯하다.
▲ 난가벽(欄柯壁)
백화산 ‘구수천팔탄(龜水川八絶灘)’ 의 4灘.
절벽이 구수천변에 병풍을 두른 듯이 산을 의지하여 서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제일 요란하다.
‘백화팔경(白華八景)’에다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가 ‘백화동대벽기(白華洞㙜壁記)’에 “옛 사람을 조문하고 막히고 쌓인 것을 토로해보지만 다 할 수야 있겠는가? 늙은이가 겉으로 드러내어 감당할 바가 너무 많구나? 오직 두 가지만 여기 남긴다. 그러므로 전하기를 그 벼랑을 일러 난가(欄柯)라 하고 그 대를 일러 아양(峩洋)이다.” 하여 난가벽(欄柯壁)으로 전해진다. 아양(峩洋)은 곁에 접한 상주 탄금대 임천석대를 지칭한다.
난가벽 맞은편 폐사지 진불암을 거쳐 몽고군이 패퇴하여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는 방성재로 닿는 옛길이 나오고 임천석대에서 구수천팔탄을 따라가면 몽고군이 섬멸된 저승골, 저승폭포에 이른다.
▲ 八節鳴灘 여덟마디 우는 여울
김재륜(1776-1846)
非竹非絲折折鳴 퉁소도 거문고도 아닌데 구비 구비 울리니
自然聲樂石間生 자연의 聲樂이 돌 사이에서 생겼다.
浮泡飛沫雖渠使 뜬 거품 나는 물방울은 비록 네가 시킨 것이나
停則淵澄亦性情 멈추면 맑은 못 되는 게 또한 너의 性情이다.
▲ 구수정
▲ 임천석대(林千石臺)
임천석은 북과 거문고를 잘 켜는 고려 영관(伶官)으로 고려가 망하자 건너편 높은 절벽 위에 삼단으로 큰 돌을 축조하고 열 명 남짓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돌을 놓아 그 위에서 거문고를 키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고려 악사(樂士)이다.
태종이 음률을 잘 아는 것을 알고 부르자 거절하고 다시 강압을 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절명사를 남기고 바위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상주의 역사서 商山誌에 전한다.)
왕조실록 정조 편에 김광우가 ‘우주 간에 길이 빛날 충절이니 비를 새겨 남기자.’상소하자 정조 대왕이 윤허했지만 현재 비는 찾을 수 없다.
이 곳 상주 모동 수봉리 마을로 낙향하기 백오십여 년 전 파죽지세로 남하한 몽고의 강적을 만나 적의 과반을 사살하여 대첩을 이룬 건너편의 백화산 저승골, 저승폭포, 저승문을 바라보며 또 몽고군이 방성통곡하며 물러간 방성재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임천석대 위에서 북과 거문고로 망국의 한을 달랬을 것이다.
성해응(成海應)의 ‘44명의 신라, 고려인 행적을 담은’ 羅麗遺民傳에도 “임천석대 아래 떨어져 죽으니 수풀 사이로 새들이 슬피 울고 산하가 참담하였다.” 고 임천석을 기린다.
▲ 임천석대 노래( 林千石臺歌)
강세진(姜世晋)
水瀰瀰石崔崔 물은 세차게 깊게 흐르고 바위는 높디높으니
人說林君千錫之故臺 사람들이 일컬어 임천석대라고 한다.
林君麗季時伶官 임천석은 고려 말의 악사였는데
桐絲一鷗 동강에 낚시하며 갈매기 한 마리
能令鳳凰爲徘徊 능히 봉황으로 배회하게 했다.
麗王淫戱自勦絶 고려의 왕 음란을 즐기며 스스로 지쳐 파멸하니
鵠嶺伯氣寒於灰 고려의 흰 기운이 재 같이 싸늘했다.
掛我珠冠飄遠擧 벼슬자리 의관을 벗어 걸고 표류하듯 멀리 가니
一溪禽鳥近無猜 온 시내의 새들이 친근하여 시기하지 않도다.
抱琴時上百尺臺 거문고 품고 때때로 백척의 대에 오르니
蕭蕭黍離悲風來 쓸쓸한 삶에 슬픈 바람만 불어온다.
一彈潛潛亡國淚 한번 거문고를 타니 망국의 눈물 흘러내리고
再彈咽咽孤臣哀 다시 타니 외로운 신하의 비애 목이 멘다.
我是麗朝之遺民 나는 고려 조정의 유민인데
嗟爾使者胡爲乎來哉 슬프다. 임금의 사자가 어이해 멀리서 오는가.
幽絲在彈絶命詞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절명사를 다시 타니
頭上麗日看看頹 머리 위로 고려의 해 기울여져 보인다.
曲終自投臺下水 곡을 마치고 스스로 대 아래 물에 몸을 던지니
魂逐遊魚去不廻 넋은 노는 고기 따라가 되돌아오지 않네.
水不渴石不泐 물은 마르지 않고 돌은 닳지 않아
林君義烈與之留 임천석의 의로움이 더불어 머물러 있다.
藁萊烈光 풀이 무성한 곳에 의로움이 빛나니
暖暖山鳥悲 해맑은 산새소리도 슬퍼진다.
我今發揮歌 내가 이제 노래로 펼쳐
詩傳八垓 詩로 온 세상에 전한다.
▲ 진불암 옛터
진불암(眞佛庵) 藏園 黃源善
酹酒林千石 임천석대에서 항신술 올리고
斜陽淨界尋 석양에 암자 찾았다.
人亡庵不見 사람 없고 암자 보이지 않으니
白日故陰陰 한 낮에도 아직껏 느늘음 하네.
▲ 구수천
▲ 옥동서원 주차장 화장실 :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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