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천(산수유 마을) http://blog.daum.net/onidiras/15874933
상천마을은 아랫마을을 백운동이라고 부르고 윗마을을 초경동이라고 부른다. 상천리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선생이 비단에 수를 놓은것 같이 빼어난 산이라 하여 금수산이라고 명명한 금수산을 정상을 배경으로 가은산과 금수산 줄기로 에워싸여 있으며 앞으로는 청풍호를 바라보는 남향마을로 초경동에서 바라보는 청풍호는 가히 결경인 마을이다.
특히, 백운동마을 초입에서부터 용담폭포에 이르는 돌담길 주변에는 봄의 전령인 산수유가 자생 하고 있어 만개한 산수유는 금수산 풍광과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산수유 마을이다.
2002년 충북의 자연환경의 명소로 지정된 산수유마을 상천리는 2003년 제천시가 친환경민속마을로 지정하면서 농업홍보관, 참숯 불가마, 휴게식당 등을 조성하였고, 산수유 1천본을 추가 식재하여 친환경 민속마을이자 산수유마을로 유명해졌다. 이 마을은 금수산을 오르는 길목에 있어 매년 수십만의 등산객이 이 마을을 찾고 있다. 이 마을은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여 상천리에서 생산되는 산수유, 사과, 복숭아의 당도가 높고 품질이 우수하여 특산품으로 자리잡고 있고, 친환경 농산물 또한 이 마을 주민들의 큰 소득원이며, 민박, 돼지목삼겹 등이 이 마을의 대표적 먹을거리로 유명하다.
▲ 동화리 1구/덕대울 http://blog.daum.net/onidiras/15874946
500년전 안터에 터전의 안식처를 잡고 수백호가 사기그릇을 제작하여 생활하면서 살고 있던 중 귀하고 불이나서 지금의 덕대울에 이주 수백호가 거주하여 구한말 남상면 덕대울이라 칭하여 왔으며 일제통치 개명에 의하여 동화산 이름을 따서 동화리라 하였음
아산시 농촌지도소
▲ 이화동 벽화마을 http://blog.daum.net/onidiras/15874996
▲ 무섬마을 http://blog.daum.net/onidiras/15875294
▲ 마을 유래 http://blog.daum.net/onidiras/15875956
생달리는 안산다리와 바깥산다리로 구분되는데 워낙 협곡에 위치한 마을로서 둘레에 산과 저녘달만 볼 수 있다 하여 산다리라 이름지어졌다 또는 바깥산다리 어귀에 안산다리로 통하는 길에서 고불멱으로 가자면 개울을 건너야 되는데, 그 높이가 5-7m 가량 되어 흔히 장날 같은날 술에 만취되어 그 와나무 다리를 건너다가 다리 아래 개울로 떨어지는 사람이 많았으나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어 산다리라 불리어졌다는 양설이 있다. 지금은 1971년 법정리동이 행정리동으로 바뀌면서 생달2리는 안생달이 차갓 등으로 구분되어 지금에 이른다.
차갓재 : 안산다리와 차갓 사이에 있는 고개. 차갓은 왕을 뜻하는 것으로 선화공주가 다녔던 곳이라 하여 차갓재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고 차돌이 많아 차갓재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차갓재를 넘으면 생달리 최북단에 위치한 차갓마을이 있다.
우망골 : 차갓재를 넘으면 넓은 풀이 많아 가축을 먹이기에 좋았다고 한다. 소 수십 마리를 먹여도 풀이 남는다고 하여 우망골이라 한다.
비바위 : 바위에 햇빛이 비치면 햇살 사이로 비가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바우라 하였고 길쌈 할때 베를 짜서 걸어놓았다고 하여 비바우라고 불렸다 한다.
▲ 오미자 희망마을 http://blog.daum.net/onidiras/15875956
우리 마을은 백두대간 황장산과 대미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서 해발 500m-6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어 아직까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자연경관을 보존하고있다. 주민들은 30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오미자 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농가마다 무공해 청정 오미자를 생산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황장산(1077.3m)은 백두대간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어 골짜기가 깊어 원시림이 잘 보전되어 있고, 암릉과 암벽이 빼어나 철마다 많은 등산객이 망문하고 있다. 차갓재에는 백두대간 중간지점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또 우리마을은 농림식품부에서 선정하는 문경 오미자 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대상지로 서정되었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문경의 특산물인 오미자의 위상이 더 높아지고 살고싶은 아름다운 마을로 거듭나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봉하마을 http://blog.daum.net/onidiras/15875987
▲ 유왕골 유래비 : 백제 시조 온조(溫祚)가 기원전 18년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할 때 이 곳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도하였다고하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이곳에 와 있으면서 오룡쟁주지세(五龍爭珠之勢)라고하는 당시 도솔(兜率) 땅을 살핀 후 930년에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를 두었다하여 마을명이 유왕(留王)골로 불리어오고 있음에 이 유래비를 세운다.
서기 1998년 9월 10일 http://blog.daum.net/onidiras/15876138
▲ 속리산 둘레길 사기막리마을 http://blog.daum.net/onidiras/15876707
▲ 감천문화마을 http://blog.daum.net/onidiras/15877196
▲ 차이나타운 삼국지 http://blog.daum.net/onidiras/15877196
▲ 보암마을 유래비(寶岩마을 由來碑) http://blog.daum.net/onidiras/15877425
寶岩마을은 維磨寺(유마사)를 창건한 維磨雲(유마운)의 딸 保安(보안)이 保安寺(보안사)를 이 곳 건립한 이래 保安寺의 이름을 取(취)하여 保安이라 하였다는데 그 後 와전되어 寶岩으로 변했다고 傳한다. 마을은 큰 동네 잿몰 미륵쟁이 돌쟁이를 合하여 寶岩이라 하였는바 水沒 前까지 80가구 이백 여수의 人口가 居住했었다. 동쪽으로는 赤壁江 건너 甕城山(옹성산)이 웅장하게 서 있고 서쪽으로는 방석보재와 멀리 별산이 보이는데 남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적벽강 물이적벽들과 보암들을 펼치게 한다. 북쪽은 부들재 넘어 노루목 마을과 학당 마을이 보인다. 寶岩 마을은 서기 1614년 光山金氏 OO공이 돌쟁이로 入鄕(입향)하면서 1761년 達城徐氏 光修公과 影錫公이 1821년 慶州鄭氏 漢鉉公이 1907년 南平文氏 基洪公이 入鄕하여 형성된 마을로서 寶岩이란 마을이 아름답게 遺跡(유적)이 散在(산재)해 있으니 고인돌이 三八墓나 群落(군락)을 이루고 三層石塔(삼층석탑)과 浮堵(부도)와 彌勒等(미륵등)이 保安寺(보안사)의 寺地였음을 보여준다. 돌쟁이에 處士 金漢 鳴所築(명소축)의 松石亭(송석정)과 마을 앞 강 건너에 纔岩奇壁(재암기벽)이 홀로 서 있으니 晩翠(만취) 金容煥의 遊釣(유조)터인 姑蘇釣臺(고소조대)이다. 또한 村前 烏巣峙(오소치) 아래 鄭者 斤老味(정자 근노미)의 孝子碑(효자비)는 墓下(묘하) 路邊(노변)에 애계나무인 孝木(효목)이 出天之孝(출천지효)임을 立證(입증)시켰으니 以孝命族(이효명족)으로 每年(매년) 寒食(한식)에 面民(면민)이 感孝祭(감효제)를 올려 追慕(추모)하였다. 本 由來(유래)는 金錫中 朴三基 金喜中 鄭判柱 金鐘允 徐東善 등 諸賢(제현)과 熟議(숙의)하였다.
청천면 사기막리
* 면의 서쪽에 위치한 몽촌마을로 고려 때 사기를 굽는 막사가 있었다 하여 사기막이라는 명칭이 생김
* 자연마을로는 상촌, 중촌, 하촌 등이 있는데 사기막의 위쪽, 중간,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임
* 벼와 고추가 주산물이며 특용작물로 담배가 생산되고 있으며 여름, 가을에 송이 채취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음
* 용추계곡의 용추폭포가 마을의 자랑이며, 용추폭포의 소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음.
▲ 국수거리 http://blog.daum.net/onidiras/15878016
▲ 비룡(飛龍) 마을 유래문 http://blog.daum.net/onidiras/15879128
백제의 땅 위례산 높은 곳의 정기(精氣)를 이어받은 샘 이곳에서 용(龍)이 날아올랐다. 하늘의 서기 어린 축복(祝福)의 땅에 마을 열리니 비룡(飛龍)이라 하였다.
너른들 펼쳐져 마을사람들이 모두 풍요를 누렸고 넉넉한 마음을 지녔으니 대대로 복(福)을 누리는 비룡마을.
부모(父母)님께 효도(孝道)하고 형제(兄弟)간에 화목(和睦)하며 바른 예절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니 비룡(飛龍) 발전(發展) 영원(永遠)하리라.
또한 이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고향(故鄕)을 사랑하며 조상님들의 음덕(蔭德)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 우리 마을의 아름다운 뜻이 대대손손(代代孫孫) 계승(繼承)되기를 바라며 이곳에 비(碑)를 세우노라.
서기 2009년 11월
비룡마을 주민 모두 뜻을 모아 ...
▲ 용연(龍淵)마을의 유래 http://blog.daum.net/onidiras/15879310
땅 넓고 물 좋은 지원동의 용연(龍淵)마을은 옛 지한(地漢)면의 이름을 따서 1957년 지원동(地元洞로)으 불렀다.
용연마을은 제2수원지와 용추폭포가 있는 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샘골에서 발원하는 광주천(光州川)은 용추계곡 물통골 물은 무등산의 자랑거리 용추폭포를 만들고 용소(龍沼)의 벽계수는 제2수원지에 명경수로 잠겼다가 흐른다. 광주천 상류의 첫 번째 동네 용연마을은 150만 대도시 속에서도 한적한 산속 시골경관을 나타내는 청정한 자연마을이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고종 13년(丙子 1876) 가믐 때 전라감사 정범조(鄭範朝)가 무등산 용연마을에 와서 기우제를 올리고 내려오는데 가물었던 하늘에 돌연 검은 구름이 모이기 시작하여 약간의 비가 뿌렸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때 서석산하백양동(瑞石山下白陽洞)을 용연(龍淵)이라고 하자하여 그 후부터 이 마을 이름을 용물골, 용솟골, 배양골에서 용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