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용순 여사 묘소
배용순 여사는 1922년 윤봉길의사와 결혼을 하여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1998년에 작고하였습니다. http://blog.daum.net/onidiras/15873898
▲ 무덤 : 주변 사각형으로 돌담을 쌓아놓았다. http://blog.daum.net/onidiras/15874004
▲ 경순왕(敬順王) 경천묘(敬天廟) http://blog.daum.net/onidiras/15875129
원주시 향토유적 제1호
경순왕(敬順王)은 신라 제 56대 왕으로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8세손(世孫)이며,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는 하대(下代, 제37대 선덕왕 이후)로 접어들면서 중앙귀족간의 왕위쟁탈전과 지방세력가와 하층민의 잦은 반란으로 통치력은 점차 약화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신라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건국되어 후삼국이 성립되었고, 918년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고려와 후백제간에 주도권 다툼이 전개되었다.
927년 경순왕은 왕위에 올랐으나 신라는 이미 사직(社稷)을 보전할 힘이 미약한 상황이었으므로 935년(경순왕 9년) 이미 운명이 다한 신라의 형편을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무고한 백성들과 천녀사직의 문화보존을 위해 고려에 손국(遜國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평화적으로 넘겨준 뒤 명산(名山)을 두루 다니다가 이곳 용화산(龍華山)의 빼어남을 보고 그 정상에 올라 미륵불상(彌勒佛像)을 조성하고, 그 아래에 학수사(鶴樹寺와) 고자암(高自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순왕이 돌아가시자 왕을 추종하던 신하와 불자(佛者)들이 고자암에 영정(影幀)을 모시고 제사를 받든것이 영정각(影幀閣)의 시발이었다.
고려 중세에 전각(殿閣)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가 조선초에 목은(牧隱) 이색(李穡), 양촌(陽村) 권근(權近) 등에 의해 전각이 중수되었다. 그 후 조선 숙종 때 원주목사 김필진(金必振)이 새로 화상(畫像)을 그리고 다시 전각을 지어 모셨으나 화재를 당했고, 영조 때 재건되면서 임금이 영정각의 명칭을 '경천묘(敬天廟)'로 하사(下賜)하였다.
그 후 경천묘(敬天廟)는 소실되어 버렸으나, 경순왕이 머물렀던 유래에 따라 이곳의 지명이 귀래면(貴來面이)이라 불리어지게 된 점과 무고한 신라인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신라문화를 지켜낸 왕의 충정을 기리고자 원주시는 2006년 9월 이곳 미륵산 아래에 경천묘를 복원하였다.
▲ 두정동 토광묘(土壙墓) http://blog.daum.net/onidiras/15875244
두정동 토광묘는 전체 지역에서 22기 이상이 조사되었다. 지하로 무덤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목관 혹은 목곽을 시설한 다음에 시신을 안치한 것이다. 모두 등고선 방향으로 나란하게 장축을 두어 만들었다.
토광묘의 묘광은 대부분 길이 250-300cm, 너비 100-130cm 내외의 규모이며, 목고ㅘㄱ의 길이 180-250cm, 너비 60-80cm 내외의 규모이다. 묘광 내부에 시설되어 있는 목관은 관재를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서 " ㅂ"자형과 "ㅍ"자형, 그리고"ㅁ"자형이 확인된다. 토광묘에 사용된 목곽의 결구에는 관정이나 꺾쇠와 같은 별도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목재만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유물이 출토되는 위치에 따라서 피장자의 침향을 알 수 있는데, 동쪽으로 머리를 두어 시신을 안치한 흔적이 확인된다. 토기는 한 쪽에만 유물이 놓여 있는 것과 양쪽 ㄷ단벽에 놓여 있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철기는 대부분 관의 중앙에 위치한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 그리고 장신구로 구분된다.
두정동 토광묘는 4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걸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유적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4세기 전,중기의 백제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출토물 : 토광묘에서 발견된 항아리, 토관모습 등
▲ 두정동 분구묘(墳丘墓) http://blog.daum.net/onidiras/15875244
두정동 분구묘는 지상에 흙을 돋우어서 구축한 것으로 두정동의 전체 지역에서 가장 탁월한 위치인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분구묘의 규모는 남북길이 1,400cm 높이 110cm 이며 장타원의 평면형태를 하고 있다.
분구묘 내부에서 조사된 매장주체 시설은 토광 2기, 토장 2기, 석곽 1기, 옹관 4기 등 모두 9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분구는 판축형태로 흙을 쌓아올리고 표면에 작은 할석재를 이용하여 즙석한 것이 확인된다. 하나의 분구 내에 여러기의 매장시설을 조상한 다장묘적 성격을 갖추고 있다.
유구의 분포는 분구를 중심으로 1호토광과 2호토장, 석곽이 각각 분포하고 능선의 북동쪽에 2기의 옹관과 2호토광이, 그리고 능선 서쪽에 2기의 옹관이 각각 위치한다. 출토유물은 심발형토기, 단경호, 직구단경호 등의 토기류와 도자, 꺾쇠 등의 철기류가 있다.
두정동 유적에서 조사된 분구묘는 천안을 비롯한 충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것으로 그 동안 서울 가락동 1,2호분, 석촌동, 익산 율촌리에서 비슷한 유적이 알려져 있기는 하였지만 이 역시 체계적인 비교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분구묘가 백제국가의 형상과 관련지워 설명되어 왔던 만큼 앞으로 유적의 조성연대를 비롯하여 축조방식, 출현배경 등에 대해서 깊이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두정동 주거지, 옹관묘(甕棺墓) http://blog.daum.net/onidiras/15875244
위치 : 충남 천안시 두정동 일원
시대 : 백제시대
두정동 백제유적은 주거유적과 분묘유적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주거유적은 주로 I 지구로 분류된 지역에서만 조사된 반면 분묘유적은 I, II 지구 모두에서 조사되었다. 백제시대 주거지는 현재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I 지구로 분류된 지역에서 모두 4기가 조사되었다. 지하로 땅을 파고 만든 수혈주거지인데, 장방향 평면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것은 길이 11m 내외 동서너비 6m의 것이다. 특히 3호 주거지는 불에 탄 채 매몰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가옥을 구축하였던 목재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장차 이 시기 가옥구조의 복원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옹관묘는 지하로 무덤 구덩이를 파고 옹을 관으로 하여 만든 것이다. 조사된 II기의 옹관묘 모두 백제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대체로 2개의 생활용기를 사용한 합구식의 옹을 횡치하여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옹관묘는 독립된 별도의 구역에 축조되기 보다는 대체로 토광묘 주변에 몰려있어 토광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분구묘에서 조사된 옹관묘는 중도식 경질무문토기를 사용한 것이 있는데, 분구묘, 주거지, 토광묘 등과 함께 동일 시기에 조성된 고분으로써, 백제고분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주요 출토물 : 주거지 출토 화로형토기, 주거지에서 출토된 사람 모양 손잡이, 유적출토 인면파수부 등
▲ 해위 윤보선대통령묘역 http://blog.daum.net/onidiras/15876204
▲ 안내문 http://blog.daum.net/onidiras/15876204
이곳은 해위 윤보선 대통령과 그 가족들의 묘역입니다. 산의 모양이 용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로 오르려는 모습과 닮았다하여 비룡산이라고 합니다. 제일 위에 있는 묘는 윤대통령과 공덕귀 권사 내외분의 안식처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조상들의 묘소보다 본인이 더 위쪽에 자리잡은 것에 대해 할아버지가 손자를 어깨에 무등 태우고 계신 모습과 같지 않느냐고 생각하셨습니다. 이 묘소는 생전에 대통령 본인이 준비해두신 자리입니다. 비석은 돌아가신지 십년되는 2000년 7월에 큰아들 상구가 부탁하여 글은 조카 이기종이 다듬고 글씨는 여초 김응현박사가 썼으며 둘째아들 동구가 비석 모양을 설계하여 세운 것입니다.
위로부터 두 번쨰 묘는 윤대통령의 고조할아버지 되시는 협판공 득실 내외븐의 것으로써 이 산에 제일 먼저 쓰여진 묘입니다. 이 비봉산에 윤씨 산소가 자리잡게된 연유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득실공의 삼남이신 찬정공 취동께서는 마흔이 넘도록 자녀가 없으셨는데 항상 집 잎에 죽을 쑤어 놓는 등 많은 적선을 하셨답니다. 한 번은 병든 스님을 돌보아 드렸는데 그 스님께서 이 묏자리를 가르쳐주심으로써 후의에 보답하신 것입니다. 그 후 그 자리에 부친 득실공을 모시고 난 뒤 아들 형제를 보시게 되었고 집안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묏자리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덕을 쌓으시고 좋은 일을 많이 하신 결과라고 믿습니다. 득실공의 묘비는 손자되시는 정헌대부군부대신 웅렬공이 세운 것이며 이 분이 바로 위에 이야기한 형제 중 맏이십니다.
위로부터 세 번쨰 묘는 득실공의 장남되시고 대통령의 큰 증조부되시는 교동공 내외분의 묘로써 비석은 대통령께서 쓰고 세운 것입니다. 위로부터 네 번쨰 묘는 대통령의 부모님이신 동야치소 장로와 이범숙 권사의 묘입니다. 이 묘에 비석 역시 대통령께서 쓰고 세운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섯 번째 묘는 대통령의 증조부 되시는 취동공의 첫 부인이신 고령신씨의 묘입니다. 맨 아래 묘는 막내 동생이신 형선의 묘입니다.
윤대통령의 조부되시는 경제공영렬은 경기도 평택시 객사리에 모셔졌으며 또 대통령의 증조부되시는 취동공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석곡리에 있습니다.
▲ 천주교 공세리성당 공원묘역 http://blog.daum.net/onidiras/15876209
▲ 불로고분 자연마당
▲ 대구 불로동 고분군 http://blog.daum.net/onidiras/15876321
사적 제262호 대구 동구 불로동
이 곳은 현재 200여 기의 삼국시대 고총고분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 대규모 고분군이다. 1938년 최초로 조사된 이후 1968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2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분구의 규모는 지름 15-20m, 높이 4m 전후이며, 매장주체부인 수혈식석곽의 규모는 길이 4.5-8m, 너비 0.8-1.2m, 깊이 1.0-2.2m 정도이다.
석곽의 네 벽은 냇돌 또는 깬돌을 이용하여 쌓았고, 바닥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았다. 일부 석곽에는 간벽을 쌓아 유물을 부장하는 공간과 시신을 매장하는 공간을 구분한 것도 있다.
출토유물은 말그림이 새겨진 뚜껑 등의 토기류, 재갈, 행엽 등의 마구류, 철촉 등의 무기류, 생선뼈가 있었다. 고분군의 조성연대는 5-6세기경이며, 이 지역 지배세력의 분묘들로 추정된다.
▲ 무덤 : 중국은 화장 문화인데 운남성은 아직도 무덤을 만들고 있다. http://blog.daum.net/onidiras/15876747
▲ 송강정철 묘 http://blog.daum.net/onidiras/15877122
▲ 유관순열사 초혼묘(柳寬順烈士 招魂墓) http://blog.daum.net/onidiras/15877128
초혼묘는 유관순(1902 ~ 1920) 열사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졌다.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재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이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4월 1일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운동인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끊임없는 옥중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갖은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1920년 9월 28알 순국하였다. 유관순열사는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유택은 흔적 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989년 10월 12일 초혼묘를 봉안하였다.
▲ 홍양호 묘 http://blog.daum.net/yacho2011/1410 http://blog.daum.net/onidiras/15878308
지정별 : 문화재자료 제13호
지정년월일 : 1984년 5월 17일
위치 : 천안시 동님구 용곡동 462-16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의 묘소이다. 영조 23년(174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홍문관 교리 등을 거쳤다. 뒤에 사간원 대사간·사헌부 대사헌·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 등의 높은 벼슬에 올라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영조실록』·『국조보감』·『동문휘고』등을 비롯한 여러 편찬사업을 주관하기도 하였으며, 지방관의 지침서인『목민대방』을 지었다. 그 밖의 저서로는『육서경집』·『고려대사기』·『동국명장전』등이 전한다. 2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오면서 석학들과 교류하여 이름을 날렸으며 고증학을 수용·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과 문장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는 평을 듣는데, 수원 화성의 북문 상량문(上梁文: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 이름 따위를 기록한 글)이 그가 쓴 글씨이다.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문헌(文獻)이라 하였으며, 부인인 동래 정씨와 합장하여 묻혔다. 합장 묘비는 순조 32년(1832)에 세운 것으로 아들 의준(義俊)이 짓고, 손자 경모(敬謨)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인터넷 지도상의 홍양호 묘의 위치가 다름. 아래 램블러를 참고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음.
▲ 홍낙원 묘 http://cafe.daum.net/ojy102796/UsiF/1?q=%C0%CF%BA%C0%BB%EA%20%C8%AB%B3%AB%BF%F8%20%B9%A6 http://blog.daum.net/onidiras/15878308
▲ 홍양호 묘 http://blog.daum.net/onidiras/15878310
▲ 병천장과 박문수 묏자리 http://blog.daum.net/onidiras/15878990
박문수가 의관동[지금의 병천면 관성리]에 사는 박 사부와 함께 충청북도의 만뢰산으로 묫자리를 보러 갔다. 박문수와 박 사부는 만뢰산(萬藾山
)에 올라가서 산천을 보고 내려오면서 명당을 찾기로 하였가. 박 사부는 산위 왼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의동[지금의 병천면 관성리]이라는 곳에 자리를 정하였고, 박문수는 오른쪽으로 내려오다가 서쪽 방향으로 향하니 은석산(銀石山)에 묫자리로 괜찮은 곳이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건데 박문수가 묫자리를 보러 가는 길에 수행한 시종이 한 명 있었다. 박문수는 '내 묫자리만 정하지 말고 시종도 하나 정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을 더 내려오는데 병처면과 북면의 경계 지역에 다다르니 꽤 괜찮은 명당이 나타났다. 박문수는 시종에게 "내 자리를 여기다 정할 테니 너는 아까 저기 은석산으로 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하고 물었다. 시종은 은석산 보다 그곳이 더 좋은 묫자리라 생각하고는 "아, 어떻게 소인이 대감 위에 있겠습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마찬가지인데 그냥 대감은 거기로 정하시고 저는 여기다 정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박문수는 할 수 없이 아래쪽 명당을 시종의 묫자리로 잡아 주었다. 은석산의 묫자리도 좋은 곳이지만 그곳은 손(孫)이 적은 곳이었다. 시종은 경주 김씨인데, 박문수 덕분에 묫자리를 잘 써서 후손이 많이 번성하였다.
박문수는 자기 묫자리를 정하고 나서 병천장이 세 번 옮기거든 은석사 절터 장독대로 묘를 옮기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후손이 변변치 않아 병천 아우내장터가 세 번 옮겼어도 묘를 이장할 후손이 없었다. 실제로 박문수는 7대는 양손을, 8대 혈손을 두었다. 7대까지 혈손이 낳은 자식이 없어 친척 중에서 양자를 들였고 7대 양자를 한 뒤에 아들을 낳아 8대에 혈손이 뒤를 이었다.
▲ 천마총 http://blog.daum.net/onidiras/15879306
▲ 경주 봉황대 http://blog.daum.net/onidiras/15879307
▲ 홍양호 묘 http://blog.daum.net/onidiras/1588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