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오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희생자 전투 약사(略史) http://blog.daum.net/onidiras/15876930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은 1894년(고종 31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대항하여, 고부군의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쇠스랑과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 무장으로 시위를 벌여 시작되었다.
가을에 이르러 갑오농민군은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항일의병적인 성격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일본군을 쫒아낼 목적으로 궐기한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운동으로 평가된다.
천안·목천·전의 고을의 동학혁명군 1,500여명은 8월부터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9월 2일에 세성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전투준비는 천안삼노(김용희·김화성·김성지)가 맡았다. 총지휘는 김복용, 중군은 김영우, 화포대장은 원금옥이 맡았다. 당시 세성산 전투는 남·북접 연합군이 공주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관군의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세성산의 높이는 해발 189m의 비교족 야트막한 산이지만 형상이 마치 사자 같아서 만인을 잡아먹을 산이라고 전해져 왔다.
음력 10월 21일 이른 아침 죽산부사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이 세성산의 농민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농민군들은 관군의 정예부대 앞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산야를 피로 불들이며 산화했다.
세성산 전투에서만 전사 농민군이 370명(중상자 77명, 포로 17명)이었으며, 이를 포함하여 세성산의 갑오농민군들은 약 1,000여명이나 살육을 당하였다.
이에 갑오농민군의 후예인 천안의 농민들이 갑오년 농민군들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천안 시민들의 뜻을 모아 피맺힌 역사를 여기에 기록한다.
갑오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희생자 위령제 추진 현황
* 1999년 : 갑오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희생자 위령제 추진 결성(천안민주단체협의회 및 천안농민회)
* 1999년 : 1회 갑오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희생자 합동위령제(세성산 정상)
* 2002년 : 세성산 등산로 정비 및 진입로 주차장 포장 공사
* 2006년 : 세성산 동학농민혁명 기념 학술대회(독립기념관)
* 2012년 : 갑오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희생자 위령비 건립
* 2015년 : 갑오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희생자 위령비 주변 석축 공사
* 2015년 : 제17회 갑오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희생자 합동위령제(위령비 앞)
▲ 5·18 민주항쟁 사적 14 http://blog.daum.net/onidiras/15875817
주남마을 인근 양민 학살지
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인 5월 21일 광주 시내에서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 퇴각하여 인근 주남마을에 주둔하던 계엄군들이 광주―화순간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자행한 곳이다. 특히 5월 23일경에는 승객 18명을 실은 미니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승객 가운데 단 1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때 계엄군은 부상을 당한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살해하였으며, 그후 이곳에 묻혀있던 시신은 5·18직후 주민의 신고로 발굴되었다.
▲ 민주로에서
문병란
누가 총을 쏘았는가?
누가 생명을 앗아갔는가?
마을 앞 그날의 말채나무
죽은 사람들의 핏자국을 밟고
다시 5월은 오고 꽃이 핀다
그날의 공포와 죽음의 총소리
오늘은 민주와 자유의 종이 되어
무등의 가슴 두드리며 둥둥 울린다
살아남은 자 무덤가에 추모비 세우고
가슴을 무덤 삼아 그날을 새긴다
나그네여, 가던 길 멈추고 경배하라
무등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다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주남은 살아있다 앞서서 가나니
목숨과 바꾼 민주 부여안고
산자들 일어서 이 고장 지키리라
2013.12
▲ 우리가 갈망했던 것은
전원범
금남로, 망월동, 주남마을.....
그 핏자국을 지우고
역사의 바퀴는 저만큼 굴러가고 있다.
무차별 사살.... 그 서릿발 끝에서
짓밟힌 육신을 일으키며
우리가 갈망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견고한 자존과 정신의 뼈대
사람답게 살자는 것.
생명과 평등, 자유와 행복.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주체가 되는 것.
그리하여 가슴을 펴고 눈물을 닦으며
지금도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있다.
총살과 암매장, 죽음의 골짜기 여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본다.
뜨거운 노래를 부르며 이제 우리
당당한 모습으로 선다.
나무처럼, 깃발처럼
▲ 주남마을 평화 솟대
손광은
옛부터
무등산
기맥따라 손을 잡고 반긴자리
산빛 물빛 풍광 좋은 녹두밭 웃머리
척박한 땅이지만.
자자 손손 어리꽝으로
할머니 품에 쏘옥 안겨 웃고 살았네.
까르르 까르르 손자가 웃으면
하하하 하하하 할머니가 행복한 마을.......
나는 동구밖에서 왜 이다지 슬프냐
피눈물 쏟아 질듯 슬프냐
슬픔과 분노가 가슴에 치밀어 왜 이다지 하늘닿게 솟느냐.
5‧18 광란의 총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곳
무차별 생명 앗아간 자리에 서서
생매장된 현장에 서서 왜 이다지 하늘닿게 슬프냐
슬픈 역사여 가라
독재는 가라 민주 평화에 살고 싶다.
오늘 슬픈 그늘 씻어낼 민중의 깃발
평화의 솟대 세우노니
무차별 총탄에 무저항으로 죽은 영령이여
새가 되소서. 하늘로 날라갈 새가 되소서.
하늘과 땅사이 自由를 외치면서
훨훨훨 훨훨훨 천국에도 넘나들
새가되소서.
할말이 많은 마을
창조마을의 바램과 구원을 비노니
地上과 天上을 왕래하는
새가 되소서.
▲ 위령비 http://blog.daum.net/onidiras/15875817
1980년 5월 광주,
피지도 못하고 짓밟힌 두 청년의
넔을 위로하며 작은 돌비를 세웁니다.
2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