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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정리/1월

160117 월봉산 봉서산 158m 불당동유적 피나무 열매 봉서산 남근 바위 아그배나무

 

 

▲ 피나무 열매

 

 

▲ 천안 불당동유적(天安 佛堂洞遺蹟) http://blog.daum.net/ahnjunki8698/6139972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불당동 일원
시대 : 청동기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이 유적공원은 불당지구 택지개발사업 과정에서 2002·2003년 두 차례에 걸쳐 충남발전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된 유적을 정비하고 복원하여 조성된 것이다.
불당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자리와 후대의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특히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아주 긴 방형주거지가 특징적이며, 부여 송곡리유적에서 많이 유행하는 원형·방형 집자리가 주를 이룬다. 정동기시대의 전기(前期)와 중기(中期)에 해당되는 대단위 취락유적이며, 우리나라 선사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공원은 근린공원 예정지인 II지역을 중심으로 총 32,643㎡(약 9,800평)에 조성되었다. 집자리는 II지역에서 발굴된 14·17호 집자리와 III지역에서 발굴된 5·6·7호 집자리를 전사이전하였으며, 움집은 이들 집자리를 그대로 복원한 후 지붕을 추정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II지역의 3·14·15호 집자리, III지역 5호 집자리는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II지역의 1호석실묘는 원형대로 보존하였다.

 

▲ 봉서산 등산 안내도

 

봉서산은 해발 158m로 북쪽의 노태산과 남쪽의 월봉산까지 낮은 능선으로 이어졌던 산으로 풍수지리상 봉황새가 제집으로 돌아온다는 형상(飛鳳歸集形)과 봉황이 깃들어 쉬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부근의 봉명동(鳳鳴洞)은 봉황이 울었다는 뜻의 지명이 있다.

 

봉서산 동쪽기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돌도끼, 돌칼, 토기 등 석기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등산로 중간의 배드민턴장 옆에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남,여근석(男,女根石) 2기가 나란히 있고, 인근에 2008년도에 조성한 자연생태학습장이 있어 학생들의 체험학습공간과 시민정서에 도움을 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 봉서산 정상 158m

 

봉서산(鳳棲山)은 서쪽 쌍용동에서 북쪽으로는 노태산, 남쪽으로는 월봉산까지 뻗쳐진 산으로 봉황이 깃들어 살았던 산이라 하여 봉서산이러 불리게 되었다. 풍수지리상 이 산에 비봉귀소형((飛鳳歸集形)의 명당이 있는데 이는 봉황이 제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며, 봉서산 부근에는 봉황이 울었다는 뜻의 봉명동(鳳鳴洞)의 지명이 남아 있다. 봉서산 쪽 기슭에서 석기·청동기 시대 돌도끼 등이 출토되어 선사 시대부터 인류의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고 있다. 봉서산은 전체가 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쪽은 서부대로가 관통하고 산자락 남은 부분은 쌍용공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 천안시청과 천안시 종합 운동장이 자리잡고 있다.

 

 

▲ 봉서산(鳳棲山) 남근(男根)바위

 

이 곳 남근바위는 처음 백석동의 어느 절터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00년 전인 1700년대쯤 봉서산 입구 개목마을로 자리를 옮기게 된 후 1970년대 후반 토지구획 정리로 주변이 정리되면서 천안시청 앞마당에 옮겨진 후 다시 천안삼거리로 위치를 옮겼다.
남근바위를 다른 지역으로 옮긴 후로 마을에 변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고민 끝에 남근바위를 마을에 돌려줄 것을 건의하여 1990년 초에 지금의 봉서산에 옮겨 놓았다.
남근바위는 이름처럼 실제 남근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근바위 앞에는 상석(床石)을 만들어 두었다. 아들을 낳길 소원하는 부인들의 치성을 드리기 위한 제물을 차려 놓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 아그배나무

 

http://rblr.co/G7JJ

http://rblr.co/G7Jb